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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상진의 코인경제학] 가상자산 커스터디, 분리 그 이후를 묻다

템플 기사단의 양피지와 신뢰의 조건…“거버넌스와 리스크 통제 능력 갖춰야”

       차상진 (법률사무소 비컴 변호사) 차상진 (법률사무소 비컴 변호사)

[위클리서울=차상진] 십자군 전쟁이 한창이던 12세기 유럽. 성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순례자들에게 가장 큰 골칫거리는 노잣돈이었다. 강도가 들끓는 험로를 통과하기 위해 사람들은 무거운 쇠금고를 수레에 싣고 무장 호위병을 고용해야 했다. '자산 보관(Custody)'의 본질이 두꺼운 철문과 물리적 공간의 분리에 있던 시대였다. 이때 금융의 역사를 바꾼 혁신이 등장한다. 바로 '템플 기사단(Knights Templar)'이다. 이들은 파리 지부에 금화를 맡기는 순례자에게 정교한 암호가 적힌 양피지(신용장) 한 장을 내어주었다. 순례자는 가벼운 양피지 한 장만 품고 안전하게 바다를 건너, 예루살렘 지부에서 이를 다시 금화로 교환했다. 자산을 안전하게 보관한다는 것의 패러다임이 무거운 '물리적 금고'에서 정교한 '암호와 장부'라는 네트워크적 신뢰로 진화한 역사적 순간이었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 자본시장에서는 디지털 자산의 '보관(Custody)'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가상자산이 제도권으로 편입되고 법인 투자의 문이 열릴 조짐을 보이면서, 고객 자산 보호를 위해 가상자산 거래소의 보관 기능을 떼어내어 완전히 독립된 제3의 기관에 맡겨야 한다는 '기능 분리 의무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과거 마운트곡스(Mt. Gox) 사태부터 잊을 만하면 반복되어 온 대형 거래소들의 해킹 피탈 사건이나 최근 경찰청, 국세청 등에서 발생한 사고를 고려하면, 법인과 기관의 막대한 자산을 물리적으로 단절시켜 안전하게 보관하려는 시장의 요구는 합리적이다.

하지만 온체인(On-chain) 기술이라는 새로운 양피지가 등장한 시대에, 우리가 진지하게 던져야 할 질문은 "무조건 떼어내는 것이 정답인가"가 아니다. 분리를 한다면 '자율규제(이해상충 관리)'와 '법적 강제(완전 분리)' 중 어느 것이 현 시장 구조에서 더 효율적인가, 그리고 커스터디가 갖추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확인해야 한다.

현재의 디지털자산거래소는 자본시장에서 증권회사, 한국거래소, 청산(CCP), 한국예탁결제원의 기능을 모두 한 몸에서 수행하는 독특한 구조를 띠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커스터디를 강제화하여 파편화된 다수의 커스터디를 통하여 다수의 거래소에서 거래를 할 경우, 필연적으로 커스터디와 거래소 간 청산·결제를 담당할 별도의 인프라가 요구되며 커스터디-거래소-커스터디 간 자산이전에 따른 가스비 증가를 발생시킬 수 있다. 미국과 EU 등 주요국들이 법적 강제 분리 대신, 회계적 분리와 내부 이해상충 관리라는 유연한 방식을 택하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장의 특수성과 투자자 보호를 위하여 '법제화(강제 분리)'를 선택할 수도 있다. 다만 분리를 한다면 논의의 초점은 '분리 그 자체'가 아니라 '분리된 커스터디가 무엇을 갖추어야 하는가'로 신속히 이동해야 한다.

자산의 위탁은 '신뢰'를 통화(Currency)로 삼아 거래된다. 현재 전통 금융기관들은 내부통제제도와 책무구조도 제도를 운영중이며, 내부통제 위반 시 임원이 책임지는 임원책임제도 하에 업무를 운영중이다. 만약 이들 금융기관이 법인의 거대한 자금을 들고 디지털 자산 시장에 진입하려 할 때, 단지 '거래소와 법적으로 분리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와 같은 의무가 전혀 없는 신생 커스터디 사업자에게 대규모 자금을 맡길 수 있을지, 그리고 비금융기관이 기존의 금융기관을 두고 신생 커스터디 사업자를 신뢰할 수 있을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몇몇 선도적인 기관투자자들은 신생 커스터디 사업자를 신뢰해보기로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구조에서는 단 1번의 사고로 커스터디 사업자들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릴 수 있고, 한번 이와 같은 사고가 발생하면 기관들은 커스터디 사업자들보다는 금융기관에 더 의존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아무리 법으로 커스터디를 떼어내어 독립시킨다 한들, 시장의 신뢰가 저절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기관투자자들은 새로운 양피지를 발행하는 기관이 그에 걸맞은 거버넌스와 리스크 통제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어느 누구도 자산을 위탁하지 않을 것이다.

양피지가 무거운 쇠금고를 대체할 수 있었던 것은, 순례자들이 얇은 종이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보증하는 '시스템'을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대의 커스터디 생태계도 마찬가지다. 반드시 모든 사업자에게 처음부터 전통 금융기관 수준의 무거운 쇠금고를 짊어지게 하자는 의미가 아니다. 민첩하고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기술을 갖춘 스타트업도 얼마든지 이 시장의 훌륭한 플레이어가 될 수 있어야 한다.

다만 기관투자자가 스타트업에게 거대한 자산을 선뜻 맡기기 위해서는, 개별 기업의 혁신성을 넘어 그들의 업무기반인 '제도 자체에 대한 신뢰'가 전제되어야 한다. 해답은 획일적인 규제나 강제 분리가 아니라 신뢰를 확보하는 것에 있다. 커스터디 업무의 수준과 범위를 세분화하고, 각 단계별로 업무의 수준과 범위에 맞는 합리적인 신뢰 기준을 마련하여, 그 기준을 충족한 사업자라면 규모와 연혁에 관계없이 시장의 신뢰를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결국 템플 기사단이 순례자에게 건넨 것은 양피지 한 장이 아니라 신뢰였다. 오늘 우리가 법률을 통해 만들어야 하는 것은 ‘거래소로부터의 분리’가 아니라 누구나 안심하고 오를 수 있는 '신뢰의 계단'인지도 모른다.

 

■ 차상진 (법률사무소 비컴 변호사)

ㅇ 한국예탁결제원

ㅇ 국세청 

ㅇ 핀테크지원센터 혁신금융전문위원

ㅇ 대한금융변호사회 부회장

ㅇ 한국상사법학회 상임이사

 

<외부 필진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출처 : https://www.weeklyseoul.net/news/articleView.html?idxno=86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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